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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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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21 사태는 1968년 1월 21일, 북한 무장공비 31명이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를 암살하기 위해 서울 청와대를 습격하려다 실패한 사건이다. 북한의 124부대 소속 공비들은 군복으로 위장하여 휴전선을 넘어 서울에 침투, 청와대 인근까지 접근했으나 검문 과정에서 발각되어 교전을 벌였다. 이 사건으로 한국 측은 군인, 경찰, 민간인 등 68명이 사망했고, 북한 공비 29명이 사살, 1명이 생포, 1명이 북한으로 도주했다. 1·21 사태 이후 대한민국은 국가 안보를 강화하고 예비군 창설, 교련 교육 도입 등의 조치를 취했으며, 북한은 책임을 묻고 관련자를 숙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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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사태
개요
명칭청와대 습격 미수 사건
한국어 명칭1·21 사태
한자 명칭1·21 事態
로마자 표기Il·iil satae
북한 명칭김신조 사건
지도
기본 정보
발생 일시1968년 1월 17일 – 1968년 1월 29일
발생 장소청와대, 서울특별시, 대한민국
결과대한민국과 미국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대한민국
교전국 2미국
교전국 3북한
지휘관
지휘관 1박정희
지휘관 2찰스 보네스틸
지휘관 3김일성
병력
병력 1제25보병사단
병력 2제26보병사단 (일부)
병력 3제2보병사단 (일부)
병력 4제7보병사단 (일부)
병력 5124부대
사상자
사상자 1대한민국 26명 사망
사상자 2미국 4명 사망
사상자 3북한 29명 사망 및 자살
사상자 4북한 1명 포로
사상자 5북한 1명 도주
배경 및 목적
목적박정희 대한민국 대통령 암살 시도
주요 사건
사건 일자1968년 1월 21일
기타
관련 사건향토예비군 창설
관련 사건 2주민등록증 발급 실시
관련 사건 3경비경찰의 특성
피탄된 소나무
1.21 사태 당시 피탄된 소나무

2. 배경

1964년 8월 7일 통킹 만 사건을 구실로 베트남 전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미국은 한국에 참전을 요청하였다.[27] 한국은 1965년 7월에 전투부대 파병을 시작으로 파병 인원을 평균 5만 명 수준으로 유지했으며 누적 파병 총인원은 약 32만 명을 기록했다.[28] 파병에 따른 미국의 경제 지원과 더불어 베트남 특수를 누렸으나 국군 전력이 약화되었다. 이를 좋은 기회라고 판단한 북한은 국내외 여러 정세가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흐르자 대남 공작을 적극적으로 펼쳤다.[29] 비무장지대에서 도발을 일삼았고 어선들을 납치하는 일도 빈번했다. 1967년 1월에는 동해에서 어로보호작전 중이던 650톤급 해군 경비함이 북한의 해안포 공격으로 격침되는 사건도 발생했다.[30](대한민국 해군 56함 침몰 사건)

박정희는 1961년 5·16 군사정변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고, 1963년 제3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취임할 때까지 군사 독재자로 통치했다. 청와대 습격 사건은 1966년부터 1969년까지의 한국 비무장지대(DMZ) 충돌과 베트남 전쟁의 영향 속에서 발생했다.

1967년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 이후, 북한 지도부는 박정희의 국내 반대 세력이 더 이상 그의 통치에 심각한 도전이 되지 않는다고 결론지었다. 6월 28일부터 7월 3일까지 노동당 중앙위원회는 확대회의를 열었고, 김일성 주석은 간부들에게 "남조선 동포들의 투쟁을 지원할 준비를 하라"고 촉구했다.

1967년 7월, 최근 설립된 인민군 제124부대 특수부대가 박정희 암살 임무를 맡았다. 이 결정은 1967년 베트남 전쟁이 새로운 격화 단계에 접어들었고, 베트남에 몰두한 미군이 북한에 대한 보복 조치를 쉽게 취할 수 없었던 사실에 의해 촉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1965년부터 1968년까지 북한과 북베트남 관계는 매우 긴밀했고, 북한은 북베트남에 상당한 군사 및 경제 지원을 제공했다.

북한의 선전은 1966년 이후의 특수부대 침투 작전을 베트콩과 유사한 남한 게릴라 운동으로 묘사하려고 했다.[1] 1966년 1월 한국 어선이 북한 어뢰정의 공격을 받은 이후, 같은 해 11월과 1967년 4월에는 북위 38도선에서 대규모 전투가 발생하여 남북 간 긴장은 일촉즉발의 상태였다. 소비에트 연방 정보부의 분석에 따르면, 이러한 전투를 선동한 것은 북한이었다.

북한은 1966년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정찰국 내에 대남작전을 전문으로 하는 제283부대를 설립했다. 내부 숙청을 통해 1967년 8월 12일 124부대(이후 특수 제8군단으로 개칭, 현재의 경보병교도지도국)로 개편하고 게릴라 부대를 한국에 잠입시키기 위한 준비를 진행했다.

3. 무장공비 출몰

1968년 1월 17일, 북한 124부대 소속 무장공비 31명은 국군 복장으로 위장하고 수류탄기관단총으로 무장한 채 개성을 출발, 휴전선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한으로 침투했다.[25] 이들은 임진강을 건너 파평산, 삼각산 등을 거쳐 1월 21일 밤에는 청와대 인근까지 잠입했다.[21]

1월 19일, 법원리에서 나무를 하던 우씨 형제 4명이 이들을 발견했다. 무장공비들은 형제들을 풀어주면서 신고하지 말라고 경고했으나, 형제들은 즉시 법원리 창현 파출소에 신고했다.[4] 이후 무장공비들은 야영지를 철수하고 각자 30kg의 장비를 휴대하며 시간당 10km 이상의 속도로 노고산을 넘어 1월 20일 7시에 비봉산에 도착했다.

청운동의 세검정 고개 창의문을 통과하려다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의 불심검문에 정체가 드러나자, 수류탄 및 기관단총을 쏘면서 저항한 후 도주하였다.

2011년 7월의 세검정-자하문 검문소 (이후 철거됨)


1월 21일 밤 10시, 이들은 청와대에서 100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세검정-자하문 검문소에 접근했고, 종로경찰서장 최규식이 이들에게 접근하여 질문했다. 최규식은 그들의 답변에 의심을 품고 권총을 뽑았고, 무장공비들은 발포를 시작하며 검문소에 수류탄을 투척했다. 수 분간의 총격전 이후, 무장공비들은 흩어져 인왕산, 비봉산, 의정부 방면으로 도주했다. 최규식과 정종수 경사는 총격전에서 사망했고, 무장공비 1명은 체포되었으나 자살했다.[5]

3. 1. 북한 124부대

124부대는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의 특수부대로, 1967년 4월 대남 유격전 활동을 위해 창설되었다.[31] 2,400명의 정예병으로 구성되었으며, 청와대, 미 대사관, 육군 본부 등 주요 시설 습격을 목표로 훈련을 받았다.[31][32]

1968년 1월, 청와대 습격과 요인 암살 지령이 내려져 31명의 특공대가 선발되었다.[32] 이들은 한국군 복장으로 위장하고 기관단총, 수류탄 등으로 무장했으며, 2년간 훈련을 받고 마지막 15일 동안 청와대 실물 크기 모형에서 작전 연습을 했다.[2]

1966년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정찰국 내에 대남작전을 전문으로 하는 제283부대가 설립되었고, 1967년 8월 12일 124부대(이후 특수 제8군단, 현재 경보병교도지도국)로 개편되었다.

3. 2. 무장 침투

1968년 1월 17일, 북한 124부대 소속 무장공비 31명은 국군 복장으로 위장하고 수류탄기관단총으로 무장한 채 개성을 출발, 휴전선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한으로 침투했다.[25] 이들은 임진강을 건너 파평산, 삼각산 등을 거쳐 1월 21일 밤에는 청와대 인근까지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21]

1월 19일, 이들은 법원리에서 나무를 하던 우씨 형제 4명을 우연히 발견했다. 형제들을 풀어준 뒤, 이들은 경찰에 신고하지 말라고 경고했으나, 형제들은 즉시 법원리 창현 파출소에 신고했다.[4]

부대는 야영지를 철수하고, 각자 30kg의 장비를 휴대하며 시간당 10km 이상의 속도로 행군을 재개하여 노고산을 넘어 1월 20일 7시에 비봉산에 도착했다.

청운동의 세검정 고개 창의문을 통과하려다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의 불심검문에 정체가 드러나자, 수류탄 및 기관단총을 쏘면서 저항한 후 도주하였다.

1968년 1월 21일 밤 10시, 이 부대는 청와대에서 100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세검정-자하문 검문소에 접근했고, 종로경찰서장 최규식이 부대에 접근하여 질문하기 시작했다. 최규식은 그들의 답변에 의심을 품고 권총을 뽑았고, 부대원들은 발포를 시작하여 검문소에 수류탄을 투척했다. 수 분간의 총격전 이후, 부대는 해산했고 일부는 인왕산, 비봉산, 그리고 의정부로 향했다. 최규식과 정종수 경사는 총격전에서 사망했고, 특수부대원 한 명은 체포되었으나 자살했다.[5]

3. 3. 소탕작전



1968년 1월 21일 밤 10시, 무장공비들은 청와대에서 100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세검정-자하문 검문소에 접근했고, 종로경찰서장 최규식이 이들에게 접근하여 질문하기 시작했다. 최규식 서장은 그들의 답변에 의심을 품고 권총을 뽑았고, 무장공비들은 발포를 시작하며 검문소에 수류탄을 투척했다. 수 분간의 총격전 이후, 무장공비들은 흩어져 인왕산, 비봉산, 의정부 방면으로 도주했다. 이 과정에서 최규식 서장과 정종수 경사가 사망했다. 무장공비 1명은 체포되었으나 자살했다.[5]

1968년 1월 22일, 대한민국 육군 제6군단은 무장공비들을 사살하거나 체포하기 위한 대대적인 수색 작전을 시작했다. 제30보병사단 제92연대 소속 병사들은 인왕산 근처 민가에 숨어 있던 김신조를 체포했다. 수도방위사령부 제30대대는 부암동과 북악산에서 무장공비 4명을 사살했다.

1월 23일, 제26보병사단 공병대대는 도봉산에서 무장공비 1명을 사살했다. 1968년 1월 24일, 제26보병사단과 제1보병사단 병사들은 성우리 근처에서 무장공비 12명을 사살했다. 1월 25일, 송추 근처에서 무장공비 3명이 사살되었다. 1월 29일, 파평산 근처에서 무장공비 6명이 사살되었다.

이 암살 시도 과정에서 한국인 사상자는 사망 26명, 부상 66명이었으며, 이 중에는 민간인 약 24명이 포함되어 있었다.[6] 또한, 탈출하는 침투자들이 군사분계선을 넘는 것을 막으려는 과정에서 미국인 4명이 사망했다.[6] 124부대원 31명 중 29명은 사망하거나 자살했고, 김신조는 생포되었으며,[7] 박재경은 북한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8] 이 습격에서 사망한 124부대원들의 시신은 나중에 북한 및 중국군 묘지에 매장되었다.[9]

체포된 김신조 소위는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서 "나는 박정희의 목을 베러 왔다"고 말해 한국 국민들에게 충격을 주었다.[15][16]

4. 결과

1·21 사태 결과, 박정희 대통령은 남북 간 군사적 긴장을 이유로 '국가안보 우선주의'를 선언했다. 그 결과 예비군육군3사관학교가 창설되었고,[36]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교련 교육이 실시되었다. 대통령 경호 강화를 위해 인왕산, 북악산, 청와대 앞길의 일반인 통행이 금지되었고,[19] 전투경찰대가 창설되었다.[37]

대한민국 중앙정보부는 684 부대를 조직해 보복 공격을 계획했으나, 미국소련데탕트 조성으로 무산되었다.[38] 푸에블로호 사건과 달리 미국이 소극적인 반응을 보이자, 박정희미국에 작전권 환수를 처음 요구했다.[39]

이 사건으로 서울특별시청1971년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범곡리에 문서보존소를 신설했고, 2019년 은평구 녹번동 서울혁신파크에 개원한 서울기록원으로 문서를 이전할 때까지 운영했다.

4. 1. 남한

1·21 사태는 박정희 정부와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박정희 대통령은 사건 직후 주한 미국 대사에게 북한에 대한 보복 공격을 강하게 주장하며, 린든 B. 존슨 미국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북한이 사과하지 않으면 보복 공격을 하겠다고 밝혔다.[15][16] 그러나 1월 23일 푸에르토프린세사호 사건(푸에블로호 사건)이 발생하면서 미국의 지원을 받기 어려워졌고, 결국 군의 북진을 포기했다.

하지만 박정희는 북한에 대한 대응책을 요구했고, 대한민국 중앙정보부 김형욱 부장은 김일성 암살 부대 창설을 결심했다. 1968년 4월 공군 제2325전대 제209파견대(통칭 "684부대")가 창설되어 청와대를 공격했던 북한 공작원과 같은 수인 31명의 대원으로 구성되었고, 실미도에서 훈련을 받았다. 그러나 1970년 이후 남북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김일성 암살 계획은 1971년 철회되었다. 이후 684부대는 열악한 처우에 불만을 품고 1971년 8월 23일 반란을 일으켰으며, 이 사건은 실미도 사건으로 불리며 영화 실미도로 제작되기도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스파이 식별을 위해 주민등록증 발급 및 상시 휴대 의무 제도가 시행되었다.[17]

4. 2. 북한

북한은 초기에는 자신들의 소행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시신 인수를 거부했다.[42] 1968년 1월 24일 판문점에서 열린 제261차 군사정전회의 본회담에서 북한 측은 한국이 휴전 당사자가 아니므로 1·21 사태는 본회담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억지를 부렸다. 그러나 작전 실패의 책임을 물어 이효순 중앙당 연락국장, 김창봉 민족보위상, 최광 총참모장, 허봉학 대남공작총책 등을 숙청했다.[35] 이후 대남공작은 비서국의 담당비서제로 맡겨졌다. 청와대 기습 작전이 실패했으나 대남공작을 단념하지 않았다. 1968년 1월 23일에는 미군의 정보함 푸에블로 호를 원산 앞바다에서 납치했고, 그해 10월 30일부터 11월 2일에 걸쳐 울진, 삼척 지역에 120명의 무장공비를 침투시켰다.[35]

4. 3. 미국

린든 존슨 대통령은 청와대 습격과 푸에블로호 나포, 테트 공세의 시기가 베트남에서 미국의 자원을 분산시키고, 남한이 남베트남에서 2개 사단과 해병 여단을 철수하도록 강제하기 위해 조정된 것으로 간주했다.[11] 그러나 유엔군사령부 사령관 찰스 H. 본스틸 3세 장군은 그러한 연관성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청와대 습격이 북한 최고위급에서 계획된 것이라고 생각한 반면, 푸에블로호 나포는 단순히 기회주의적인 것이었고 테트 공세의 시기는 도움이 되었지만 우연의 일치라고 여겼다.[11]

5. 기타

김일성1972년 5월 4일,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과 가진 비밀회담에서 1·21 사태가 자신의 의사가 아니었고 내부의 좌경 맹동분자들이 한 짓이라며 사과했다.[40][41][42] 유일하게 도주하여 북으로 돌아간 이는 조선인민군 대장인 박재경으로, 총정치국 부총국장을 역임하고 2000년김대중 대통령에게 송이버섯을 선물하기도 했다.[43]

2013년 10월 24일 평화문제연구소 창립 30주년 기념식에서 청샤오허(成曉河) 중국 인민대학 교수는 김일성이 1965년에 제2차 한국 전쟁을 계획했지만 중국이 거부했다는 중국 외교부 기밀해제 문서(No.106-01480-07)를 공개했다.[4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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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웹사이트 The Blue House Raid Part II: "Specially selected and handpicked" | Tactical MilSim Magazine http://www.tacticalm[...] 2011-01-09
[3] 웹사이트 The Blue House Raid: North Korean Commandos Are Hardcore PT Studs | Tactical MilSim Magazine http://www.tacticalm[...] 2020-03-26
[4] 서적 Brothers at War – The Unending Conflict in Korea Profile Books
[5] 웹사이트 The Blue House Raid – North Korea's Failed Commando Assault on Seoul http://militaryhisto[...] 2016-03-19
[6] 웹사이트 Scenes from an Unfinished War: Low-Intensity Conflict in Korea, 1966–1968 http://cgsc.leavenwo[...]
[7] 뉴스 January 1968: Assassins storm Seoul; US spyship seized https://www.koreatim[...] The Korea Times 2010-01-24
[8] 웹사이트 1·21 청와대 습격사건 생포자 김신조 전격 증언 http://shindonga.don[...] 2004-01-29
[9] 웹사이트 South Korean cemetery keeps Cold War alive https://www.reuters.[...] Reuters 2008-09-10
[10] 서적 Over the Line: North Korea's Negotiating Strategy AEI Press
[11] 서적 Scenes from an Unfinished War: Low intensity conflict in Korea 1966–1969 Diane Publishing Co
[12] 서적 Tyranny of the Weak:North Korea and the World, 1950–1992 Cornell University Press
[13] 웹사이트 韓国:朴大統領、北朝鮮のサイバー攻撃への注意喚起 https://www.icr.co.j[...] Infocom 2015-02-16
[14] 웹사이트 1·21 청와대 습격사건 생포자 김신조 전격 증언“北 도주자 1명은 2000년 송이 들고 서울 온 박재경 인민군 대장”(1.21青瓦台襲撃事件 生捕者金新朝電撃証言。“北の逃走者1名は2000年マツタケ持ってソウルに来た朴ジェギョン人民軍大将”) http://shindonga.don[...] 신동아 2004-02-01
[15] 뉴스 「企画特集」北と対南挑発史④1.21事態(金新朝事件) http://www.bluetoday[...] 2013-05-10
[16] 문서 現在は、ソウル市内の教会で牧師として働いている。
[17] 간행물 SAP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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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서적 한 권으로 보는 북한사 100장면 가람기획 1996
[43] 뉴스 '신동아 2월호'…"YS청문회 막으려 940억 풀어 https://news.naver.c[...] 신동아 2004-01-30
[44] 뉴스 김일성, 1965년 '제2차 한국전쟁' 준비했었다 https://news.naver.c[...] 뉴스1 2013-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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